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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부

"제주4.3은 미국과 관련이 없다"

출처 : 제주4.3 유족회와 MBC취재진의 질의에 대한 미국의 답변

  • 기타
  • 정치, 국제
보충 설명

제주 4.3은 제주도민 3만명이 숨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1947년 3.1절 행사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서 시작돼 6.25 휴전과 함께 종료됐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 또는 좌익이라는 이유로 제주도민 3만명이 희생됐다.  희생자 가운데는 10살도 안된 어린이 800명이 포함됐다.  미국정부는 제주4.3과 관련해 언급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한국정부 역시 공식-비공식적으로 문제를 거론한 적이 없다. 다만 미국의 책임을 주장하는 제주 4.3 유족회의 방문질의에 대해 미국은 책임을 부인했다.  MBC의 공식 질의에 대해서 주한 미대사관은 "미국이 답할 사안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제주4.3에서 미국은 책임이 없는지 검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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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 등록 : 2018.09.06 13:46

    수정이유: 오타 수정

    검증내용

    1. 제주4.3 70년 끝나지 않은 고통


    <“제주도에서 발생한 비극에 대해 미국과 UN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한다”>


    1949년 4월 2일 미 국무부에 편지 한 통이 접수됐다. LA한인들이 트루먼 미 대통령 앞으로 보낸 편지였다. 이들은 미군정 시기에 있었던 또는 미국의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익으로 몰려 살해 당하는 상황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물었다.


    이 한인들이 밝힌 이 ‘비극’은 제주4.3이다. 2003년 ‘제주4.3 진상보고서’가 밝힌 공식 희생자는 14,232명, 이 가운데 772명이 10살이 안 되는 어린 아이였다. 보고서는 마을 전체가 또는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경우를 감안해 피해자가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1950년 5월 23일자 미 국무부 c-3 보고서에서 언급된 피해는 이보다 훨씬 심각했다.


    <1950.5.23 샤슈토 섬(제주도)의 현재 상황 C-3 보고서>

    4월 17일 제주도지사 김 씨는 서울에서 제주도의 상황을 이렇게 보고했다. 제주도 반란으로 인한 사상자는 정부의 발표보다 훨씬 심각하다. 반란 후에 400여 개의 마을이 170개로 줄어들었다. 공식적으로 2만7천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6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10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까지 2천명 이상이 아사했다.


    올해로 제주4.3은 발생 70년을 맞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두 살 젖먹이를 포함해 수만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제주 홀로코스트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2. 미군정 아래서 발생한 학살


    좌우익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해방정국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의 ‘모험주의’는 비극의 발단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4.3 1년 전에 발생한 3.1 사건이후 기존 노련한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제주 남로당에는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섰다. 조병옥 경무국장(경찰총장) 등 미군정의 후원을 받은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밀려오면서 이들의 폭행과 갈취, 성폭행 그리고 남한 정부의 단독선거 강행은 남로당의 젊은 지도자들이 무장 투장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5.10 총선거를 한 달 앞두고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하며 시작된 무장봉기는 이후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무장봉기를 이끈 지도자 김달삼이 이후 북한으로 탈출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일명 해주대회)에 참가하는 등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점은 수십 년 간 극우 세력들이 제주 4.3을 공격하는 빌미가 됐다.


    하지만 제주4.3이 이념의 갈등으로 인한 좌우익간의 살상이라기보다는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민간이 학살’이라는 점에서 볼 때 제주 4.3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행정 사법 권한을 쥐고 있던 미국에 있다. 미군정은 제주4.3이 일어나기 1년 전 제주 관덕정 3.1 행사에서 발생한 사건(경찰발포로 인해 민간인 사망)에 대해 진상 조사보다는 좌익 세력을 검거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미군정은 조병옥 경무국장을 통해 경찰권을 통제하면서, 서북청년단의 제주도 파견을 결정했다.


    지나친 서북청년단의 불법행위는 양민들이 좌익에 기울게 하는 동기가 됐고 미군보고서도 이를 알고 기록으로 남겼지만 미군정의 이후 결정과 행동은 이런 민심과는 달랐다.

    <48.9.30 G-2 보고서>

    "(불법행위와 관련해)경찰이 서청본부를 기습해 간부들을 체포했다 (중략) (하지만) 미군 장교들은 그동안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군정의 이 같은 행동은 서북청년단의 불법행위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용기를 주는 효과를 냈고, 급기야 두 달 뒤 제주도 총무국장이 서청에게 불법 연행돼 맞아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제주도 행정기관의 최고위 공무원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죽는 상황에서 민간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훨씬 가혹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에서 나오듯 제주도민들은 서청의 횡포를 피하기 위해 서청의 젊은이를 골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와 혼맥을 이뤄야하는 상황이었다.


    <48.11.13 G-2 보고서>

    "11월 9일 서북청년단이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을 폭행치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단지 그가 공산주의자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일본인과 미 상륙군에 대한 적대행위를 금지한다”는 주한미사령관 하지중장의 포고문 1호를 발표하며 시작됐다. 이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이 사이 발생한 군경과 우익집단에 의해 발생한 집단 학살의 책임은 미군정에게 있다. 미군정이 실질적으로 입법 사법 행정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제주도에서만 이미 800명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주로 군경과 서북청년단에 의한 희생이었다. 당시 미군정은 각 부대에 고문관을 파견해 이른바 ‘폭도’들을 진압하는 경비대의 작전을 지휘했다.


    <48.4.29 G-2 보고서>

    "제주와 모슬포에서 시작해 노루악을 휩쓴 작전에는 맨스필드 중령의 보고가 있다. 당시 슈 중령(미군정고문단장)은 59미군 궁정중대장이 현재 제주도에 있는 병력을 확실히 통솔한다면 제주도에 있는 병력만으로 상황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보고한다."


    <48년 6월 주한미육군 군정청 보고>

    "특별히 선발된 800명 이상의 경찰부대가 수천 명 규모의 국방경비대와 합류하기 위해 제주도에 파견됐다. 경찰이나 경비대 양쪽 모두 미군 고위 장교의 지휘하에 있다."


    미 국무부 관리 출신으로서 제주4.3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한 존 메릴교수(미 존스홉킨스대)는 서청 파견과 관련해 미국의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발생한 집단 학살은 한국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입장이다. 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미군정이 행정 사법 군통수권을 갖고 있었지만 정부 수립 이후로는 이런 모든 권한이 독립국가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됐다는 이유에서다.


    과연 한국정부 수립 이후 미국의 책임은 없는가?


    3. 정부수립이후 발생한 대학살


    1848년 8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과 주한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 사이에는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이 체결됐다.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 제2조>

    "주한미군사령관은 미군철병이 완료될 때까지 필요할 경우 대한민국 국방군과 경찰의 운용에 전권을 보유한다."


    한국전쟁 발발이후 미군에게 작전권을 이양했던 ‘한미 군사 협정’ 이전부터 이미 한국군은 미군의 통제 아래 있었다.

    병력 이동이나 발포 명령 등 실질적인 군사작전은 미군의 허락이 필요했고, 미군은 예하 각 부대에 파견된 군사고문단을 통해 이를 통제했다. 제주도에 주둔하며 민간인 학살을 실행했던 9연대, 2연대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같은 미군의 한국군 통제는 정부 수립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이범석 국무총리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군이 미군의 통제권하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도 했다.


    <48. 9.29 로버츠 준장이 이범석 국무총리에게 보내는 공식서신>

    한국 국방경비대의 작전 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있으며 경비대의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군 고문관에게 허락을 받아야한다.


    대규모 집단 학살이 이어진 49년 3월까지도 미군은 각종 정보 라인을 통해 상황을 일일 보고서(G-2보고서)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49.3.11 주한 미 사령관이 트펄라이트 참사관에게>

    본인은 제주도에 CIA를 설치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다. 제주도에 새로운 사령관과 참모진을 보냈으며 그들은 월터 하버럴 중령의 권고에 따라 신중하게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의 말처럼 주한미군은 정부 수립이후에도 한국군을 통솔하고 있었으며 신중하게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이 말하는 작전은 어떤 것이었는지 역시 정보보고를 통해 드러난다.


    <G-2 보고서>

    "제주 5연대 병력은 마을을 휩쓸었다. 바다로 향하는 출구와 모든 도로는 봉쇄되었다. 이 보고는 자동차로 마을에 들어간 5연대 고문관 드루스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슈 중령은 작전에 동행하지 않았는데 이는 미군들이 대규모로 동행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맨스필드와 드루스의 권고 때문이다"


    작전계획에는 경비대와 경찰 뿐 아니라 번즈나 메리트 같은 군 고문관들이 참석했다. 슈 중령은 제주도에서 작전은 성공해야하고, 더 나아가 제주도에서 군대의 활동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미군정은 고문관들을 통해 경찰과 경비대의 무장대 토벌작전을 계획하는데 참여했다. 하지만 작전 현장을 나갈 때는 규모를 최대한 줄여 미군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동시에 한국정부에는 제주도의 작전이 성공해야하고, 군대의 활동을 주목하고 있다고 주지시켰다. 미국의 군사원조를 요구하고 있던 이승만 정부에게는 상당한 압력이었다.


    이 같은 미군의 이른바 ‘작전’은 제주4.3이 집단 학살로 전개되는 과정 곳곳에서 드러났다. 대표적인 것이 ‘오라리 방화사건’이다.


    1948년 5월 3일 주한미육군사령부는 일일보고서(G-2)를 통해 제주도 폭동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사건 이틀만이었다.


    <1948.5.3. 주한미육군사령부의 일일 보고서(G-2)>

    "오라리가 5월 1일 낮 12시30분부터 3시간 동안 폭도 50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남자 2명 여자 4명이 피살되었다."


    동시에 미육군통신대는 ‘Mayday in KOREA’라는 영상을 만들어 공개했다.

    불타는 오라리 마을, 숨진 남성들과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 무장대를 쫒아 출동하는 군경.

    같은 시각 하늘에서는 미군 정찰기가 불타는 오라리를 항공촬영하고 있었다. 이 동영상은 제주4.3 전개의 결정적 전환점을 제공했다.


    제주4.3이 발생한지 한 달이 되는 시기, 당시 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를 이끄는 김달삼 사이에서는 평화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라리 방화 사건을 계기로 협상은 결렬이 됐고, 군경은 제주도민 수 만 명이 희생시키는 되돌릴 수 없는 학살 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미군이 공개한 ‘오라리 방화사건(Mayday in KOREA)’은 몇 가지 의문을 남기고 있다. 먼저 화면은 전쟁 기록영화를 위해 연출한 듯 군경의 질서정연한 모습이 담겼다. 군경을 태운 트럭이 정확하게 카메라 앞에 정차하고, 폭도들을 쫒는 경찰은 엑스트라처럼 담을 뛰어넘는다. 카메라는 완벽한 구도로 이런 긴박한 모습을 촬영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증언은 다르다.


    폭도들이 불을 지르고 질서정연하게 도주했다는 미군의 G-2 보고서와 달리, 당시 마을에 불을 지른 사람은 폭도가 아니라 우익 청년단에 소속된 같은 마을 우익 청년 박 모씨였다.


    박 씨는 이후 9연대에 방화혐의로 체포됐지만 풀려난 이후 오히려 경찰이 됐다. 박 씨는 생전 MBC와의 인터뷰에서 피해자에 해당하는 오라리 마을 사람들을 폭도로 지목했고, 당시 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포함해 9연대를 빨갱이(공산주의자)로 표현했다.


    생존자들은 당시 촬영된 흑백의 오라리 마을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경찰에게 피해를 호소하는 영상 속 여인을 기억하는 주민은 있지 않았다. 오라리 방화를 계기로 제주4.3은 평화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 많은 영상 전문가들은 기록 필름이 미군의 필요에 따라 완벽하게 연출된 영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제주4.3 시기와 관련해 미국이 공개하고 있는 동영상은 ‘오라리 방화사건(Mayday in KOREA)’이 유일하다.


    미군은 제주의 상황을 일일, 주간, 월간 등으로 분류해 보고했지만 유독 빈약한 자료는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부분이다. 미국은 민간인 학살에 대한 동영상은 물론 사진도 거의 남기지  않았으며 문자로 된 기록도 모호하거나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을 남겼다.


    다만 수 만건의 보고 가운데 폭도를 사살한 전과 기록은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고 있다.


    <9연대 피쉬그란트 보고>

    송당리 14명 사살

    침악부근 3.1명 사살

    대정리-신예리 105명 사살...생포 없음


    <49.7.28 주한미군사 고문단 연락사무소에서 2군 사령관에게>

    "연대 지휘관들은 즉결 심판을 선고하고 있다. 오전에 60-70건의 사형을 선고하고 오후에는 처형을 감독한다. 탄약이 부족할 때는 죽창이 사용된다. 죽창을 이용하면 여러 번 찔러야하기 때문에 병사들이 쉽게 지치지만, 병사들은 피곤한 줄 모르고 제비뽑기를 해서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49.10.6 G-2보고서>

    "10월 2일 게릴라 249명이 대통령(이승만)의 재가가 내려짐에 따라 제주비행장 인근 해안가에서 처형되었다. 이 가운데는 9연대에서 탈출해 게릴라에 합류한 장교 등 군인 21명이 포함됐다."


    미군이 처형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이를 저지하거나, 이에 대한 영상을 남겼다는 기록은 없다. 현장에 있던 미군은 왜 이를 기록하지 않았나? 아니면 기록을 비공개로 하고 있나?


    제주4.3 당시 제주도청에 근무했던 고성지씨는 제주국제공항 인근에서 진행된 처형 장면을 미군들이 지켜보고 이를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피쉬그란트 등 당시 제주 지역에 고문관으로 파견됐던 미군 관계자들은 한국 역사학자들과 기자와의 면담에서 한번도 학살 현장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제주도에 파견됐던 주한미군 고문관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몇 개의 보고서에서 미군들이 일부 학살을 확인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49년 2.6 주간보고서>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제 2연대 미군 고문관들은 총에 맞아 숨진 97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목격하였으나 그 죽음에 대하여 반란군, 경찰 혹은 경비대 중 누구의 책임인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49.3.3 G-2 보고서>

    "2월 20일 도두리에서 폭도 76명이 민보단에 의해 죽창에 찔려 죽었다. 피살자 중에는 여성 5명과 중학생 정도 나이의 아이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경찰과 한국헌병이 이 처형식을 감독했다. 미 군사고문단 4명이 우연히 폭도 38명의 처형장면을 목격했는데,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38명은 처형돼 있었다."


    미군 보고서는 “아무리 반란군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저지르는 잔악성을 한국 고위 관리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폭력배들에 의한 이런 행동은 미국의 민주주의 인식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보고에서처럼 미군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가치와 상반된 일이 발생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개선하려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한국을 바라보던 미국의 인식 때문이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소련 주변국가에서 도미노처럼 시작된 공산화였다. 위기를 느낀 미군은 각종 보고서를 통해 소련이 남한 특히 제주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를 작성했다.


    <47.11.25 서북청년단 제주지부장은 제주도를 한국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부른다고 미국 방첩대에 보고했다.>

    <48.6.21 미군은 한국 정부의 보고를 인용해 "무장한 김일성 전위대 160명이 진남포를 출항하여 제주도로 향했다고 한다. 이들의 임무는 폭도들을 인민군에 규합하는 것이다.(통외부 보고)>

    <48.11.20 미 극동사령부 민정정보국>

    "11월 17일 제주도에서 50마일 떨어진 곳에서 비행편대가 목격되었다. 얼마전에도 B-29 모델과 유사한 4발 엔진 폭격기가 제주도를 선회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 비행기가 소련 것일 가능성이 있다."


    미군은 서북청년단이나 이승만 정부(통외부)의 발언을 근거로 제주도가 공산세력에 점령당한 것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확인된 정보는 없었고, 미군이 소련 것으로 추정한 비행기는 이후 미군기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제주도43에 북한 전위대가 남파됐거나 소련의 무기가 공급됐다는 확인된 증거는 없었다.


    앞서 언급했듯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확장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스- 이란- 터키- 한국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냉전벨트’에서는 좌우익의 극심한 대결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제주4.3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냉전벨트’ 4개국은 모두 미국의 군사 전략적 차원에서 군사고문단이 파견됐던 나라들이다.


    <48.6.16 국무부 비밀문서 분류된 24군단사령부 정치고문 보고>

    "공산훈련을 받은 요원들이 제주도에서 고도로 조직돼 있다. 브라운 대령은 전체 주민의 80%가 이들과 관련돼 있거나 두려움 때문에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돼 있다고 추정했다. 제주도를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주도에 심각한 결과가 닥칠 것이다. 효율적인 경찰이 제주도에 주둔해야한다"


    당시 미군은 공산주의자들이 제주도를 장악했고, 주민의 80%가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된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공산주의자인 주민들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미국이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군경에 무기를 지원하는 것은 그것이 미국의 국익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로버츠가 상부에 보고한 내용은 미국인 당시 한국을 지원한 목적을 노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국 젊은이를 대신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미국의 국인을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1949.3.26.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보고>

    “장기적으로 무기와 특정 장비의 제공은 거대 산업국가인 미국에게는 별 부담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 젊은이들 대신 다른 나라 젊은이들을 우리 미국을 위해 대신 싸우도록 시킬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적은 수의 고문관들을 남겨 놓아야 한다.”



    4. 강요된 침묵, 한국정부의 침묵

    미국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이념’과 상반되지만 자신들이 해방시킨 한 식민지 국가의 섬에서 발생한 ‘야만적 학살’에 침묵했고, 다른 나라 젊은이들이 미국을 위해 대신 싸우도록 무기를 제공했다. 또 잠재적 위협,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적당히 활용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평양에 진주해서는 북한의 공산화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이른바 노획문서를 탐욕적으로 확보했다. 방대한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사진자료를 뒤져 ‘미군정 3년사(눈빛)’를 쓴 민간 사학자 박도씨는 “911 사건 이후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많은 자료들이 폐기 또는 비공개로 전환됐다”는 NARA 직원의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더욱 아쉬운 것은 피해 당사자인 한국이 이에 대한 진실 규명에 소홀하다는 것이다. 해방직후 진보 진영이 말살되면서 보수적인 정치체제가 수십 년간 유지됐고, 제주4.3의 피해자들은 70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다.


    제주4.3과 관련해 김달삼등 제주 남로당의 모험주의는 분명 책임이 있다. 좌우익의 갈등 상황에서 일부의 무장봉기를 활용해 좌익 척결에 나선 이승만 등 남한의 우익세력과 제주도에서 발생한 비극을 정치 선동에 활용한 북한도 제주4.3이 민간인 대량 학살로 번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한국정부 수립 전후 발생한 수 만 명의 죽음에 대해 미국의 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은 제주4.3이 시작된 미군정 3년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실질적으로 한국 군경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 정부에 대해 공식적인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없었다. 한국정부가 미국에 공식적으로 진실규명을 위한 자료를 요구한 적도 없으며 미국의 책임을 언급한 적도 없다.


    제주4.3과 관련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MBC의 공식질의에 대해 주한미대사관측은 “언급할 사안이 아니다”라는 답변을 내놨다. 다만 “명확한 자료를 지목할 경우 검토를 통해 정보를 제공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70년 전 미 국무부에 접수된 미국 LA한인들의 편지는 극우세력의 광기가 남길 후유증을 예견하듯 이렇게 끝맺고 있다.


    <1949년 4월 2일 LA한인회- 미 국무부 접수>

    “남한에서는 미군으로부터 훈련 받은 경찰과 군인에 의해 애국 인민들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당하고 있다. 이 비극에 대해 미국정부와 UN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한다. 그들은 한국에 괴물 정권을 세우는 도구가 되었고, 이 정권은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 씨앗’을 말살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검증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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