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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설명

일제 강점기는 수많은 우리 문화가 단절된 시기였다. 미신이라는 이유로, 조선을 완벽하게 일본 영토로 통합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로, 금전적인 욕심 때문에, 행정적인 편의를 위해서 등 갖가지 이유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유산들이 일제에 의해 사라졌다.그런데 이 중에는 무지 때문에, 또는 감정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부풀려진 사례가 여럿 있다.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면서 딱히 악의가 있어서 한 행동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우리 민족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행동이라고 간주해버리는 것이다.그 대표적인 사례가 ‘쇠말뚝 괴담’이다. 지난 4월 23일자 뉴스톱에서도 보도했지만('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이른바 ‘일제가 박았다’고 하는 쇠말뚝은 측량, 공사나 건축에 사용할 목적으로 박은 것들이었다. 애초에 일본은 풍수지리를 믿지도 않았다.그리고 또 한 가지 괴담이 바로 토종견 말살이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의도적으로 우리 토종개들을 잡아 죽였다는 주장이다. 

    최종 등록 : 2019.05.24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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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증내용

    오마이뉴스의 기사에서는 일본인들이 ‘토종개를 죽였다’고 언급했을 뿐, 그 이유는 언급되지 않았다. 개를 죽이려면 수고가 들 게 분명한데 왜 그 수고를 들여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는 중일전쟁 개전 이후 늘어난 군복 수요 때문이다.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일본은 계속 군대 규모를 늘렸고 당연히 그에 따라서 군복 수요도 늘었다. 게다가 만주 지역에서는 추위 때문에 방한복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합성섬유가 없었던 당시에는 방한복, 특히 군복이라고 하면 양털을 사용하는 모직 의류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양모를 주로 생산하는 국가들은 모두 연합국 측이었으므로 일본에서는 이를 수입할 수 없었다. 신발이나 장구류를 만들기 위한 가죽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중국만 상대로 싸우고 있던 1940년까지는 이런 제재가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해 9월에 중국으로 들어가는 물자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군이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 북부 지방을 점령하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와 철강 수출 금지를 선언한다.

    이후 일본은 군대에서 필요한 모피와 가죽을 자체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을 가죽 조달처로 이용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 사실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일제 당국이 조선에서 개를 잡아들인 게 전쟁 시기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가죽을 얻기 위해서 죽인 게 조선 개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선에서 일본인들이 개를 잡은 건 언제부터인가

    당시의 사회상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자료 중 하나가 신문기사다. 1921년 3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평양서의 야견 박살)가 실려 있다.


    "평양경찰서에서는 지난 15일부터 다가올 24일까지 사내에서 표찰이 없는 개를 박살(때려죽인)한다더라."


    이 한 건이 전부가 아니다. 1921년에만 해도 강경, 강동, 본정(지금의 서울 중구) 등지의 경찰서에서 들개를 때려잡는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이런 조치는 일제 강점기 후반기까지 계속 이어져서 진돗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 직전인 1936년에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야견박살령’을 명시한 신문기사(신둥이 유죄, 1936년 2월 12일)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통행인 피해 속출로 필경(畢竟, 마침내) 야견박살령 반포

    본정경찰서 위생계에서는 광견 ‘신둥이’가 여러 곳에서 수다한 사람을 교상(주: 물어서 다치게)한 데 느낀 바가 있어서 14일부터 16일까지 사이에 야견박살을 단행하기로 되었다는데 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개를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든지, 그렇지 않으면 외출시킬 때에는 목에다 나무패를 달되 주소성명을 서서 달 것을 잊지 말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예방주사를 시행하리라는데 그 집회소는 20일은 어성정(주: 御成町, 현대의 남대문로 5가)집회소 21일은 본정경찰서 22일은 황금정(주: 현재의 을지로)파출소라는데 작년 가을에 예방주사를 맞힌 개는 이번에 맞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 "


    이 신문기사에서 보듯, 일제 강점기 주인 없이 돌아다니는 들개와 이들이 옮기는 광견병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1937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발호하는 광견에 다수 인명이 사상축견 6만 두에 주사 실시)를 보면, 이 해 1월부터 5월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광견병이 297회나 발생하여 피해자가 1143명, 그중 사망자가 24명 이상이다. 이에 예방을 위해 당국에서 백신을 6만 마리분 준비했으나 조선 전체에 있는 개 숫자에 비하면 태부족이라고 적고 있다.

    다음 해에도 마찬가지다. 1938년 3월 18일자 동아일보(교상건수 태다로 축견 사양 제한)을 보면, 경상남도에서만도 개가 사람을 무는 사건이 작년에 100여 건에 달했고, 이에 잡아 죽인 들개(부랑견)만 39,992마리였고 10만 마리에 패찰을 달았으나 사고 감소의 효과가 없었으니, 아예 개를 키우지 못하게 하자는 논의가 관가에서 나오고 있다.

    우리가 직접 보는 경찰은 오직 치안 유지 업무만 집중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경찰은 치안 유지 업무 외에 위생, 소방업무까지 맡아 담당하고 있었다. 당연히 들개 단속도 주요 임무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위 기사에서 전형적인 악법인 것처럼 묘사한 ‘야견박살령’도 마찬가지다. 총독부에서 내리는 것도 아니고 경찰서 단위로 자기 관할구역에서, 광견으로 인한 사고가 빈발할 때만 시한부로 발령하는 조치였다. 일제 36년간 내내 경찰이 개를 때려죽이고 다닌 게 아니다.

    그럼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들개에 대한 취급이 달라졌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해방 뒤인1948년에도 광견병 창궐에 대한 주요 대책 중 하나가 “들개를 박살하는 것”이었다. (표 없는 개는 박살합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2일)


    "개를 기르는 가정에서는 주의하십시오. 서울시 예방과에서는 개에 대한 예방주사와 등록을 실시하고 있는데 일부 시민은 개의 예방주사와 등록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축견표(畜犬票)를 붙이지 않은 개에 대해서는 오는 7일부터 40일간 잡아서 죽이기로 결정했다는데, 각 가정에서는 특히 주의하여 야견 취급을 받지 않도록 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동물복지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시각을 가지고 본다면야 이런 무지막지한 살처분이 잔인해 보이겠지만, 저 당시 기준으로는 불합리한 조치도 아니었다. 더구나 개라고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인 것도 아니고, 광견병 예방접종을 병행하면서 진행했다. 대상도 표 없이 길거리나 산야를 돌아다니는 개들이다.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기 이전에도 이미 매년 수만 마리가 광견병 예방 문제로 살처분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후에는 광견병과 별개로 개를 잡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이 한 일이라고 무조건 색안경을 쓸 수는 없다. 미친개 잡는 게 우리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라면, 살인강도나 강간범을 잡아 처벌하는 일도 해서는 안 되었는가? 미친개가 일본인만 가려 물고 조선인은 안 물기라도 했단 말인가?


    조선에서만 개를 잡았을까?

    일본이 우리 토종개를 말살했다고 가장 소리 높여 분개하는 이들은 토종개 애호가들이다. 일제에 의해서 사라진 토종개 혈통을 우리 민족의 유산으로 보고 보존을 추진하는 이들이다.

    사라진 토종개를 되살리는 건 좋다. 하지만 그 명분에서 일제가 우리 민족정기를 없애려고 토종개를 말살했다 운운하면 이야기가 우스워진다. 왜냐하면, 일본은 우리 토종개에 앞서서 일본의 개와 고양이부터 털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도 적었지만, 군수용으로 가죽을 동원하기 시작한 건 방한복 때문이다. 처음에 이 용도로는 토끼 가죽이 동원되었지만, 그 수량이 부족해지자 개는 물론 고양이도 동원된다. 조선에서는 개만 대상이었지만 일본 본토에서는 고양이 가죽도 군수물자로 내놓아야 했다.

    이미 1940년 2월부터 군부 일각에서는 장차 사육중인 개와 고양이를 몽땅 잡아 가죽을 벗겨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광견병 예방과 군수물자 확보를 위해 개를 공출하자는 회람판.

    실제로 일본 본토에서도 1941년이면 농림부 축산과가 들개 모피 관리에 나선다. 광견병은 일본 본토에서도 두려워하는 질병이었고, 광견병 예방은 전쟁 중의 물자 확보와 더불어 들개 사냥의 명분이 되었다. 일본에서도 경찰과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들개를 잡았다.

    전황이 한층 더 악화되는 1943년이면 들개뿐만 아니라 고양이, 쥐, 족제비, 물개, 바다표범 따위 동물의 가죽도 군용으로 모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가죽 부족 문제는 그 정도로 해결되지 않았다.

    홋카이도 각 지역에서 현재 사육중인 개 숫자와 공출 목표량을 기재한 문서. 개 가죽은 전국에서 모아들였지만, 고양이는 홋카이도에서 주로 모았다고 한다.


    1944년에 이르러서는 군수성 화학국장과 후생성 위생국장 명의로 전국 각 지자체에 “군용, 경찰용, 천연기념물, 허가받은 수렵용” 외에는 각 가정이 기르고 있는 모든 개를 헌납 또는 공출받아 가죽을 벗기라는 지시가 내려간다. 사냥개가 공출 대상에서 빠진 건 사냥으로 얻는 야생동물의 가죽 역시 주요한 가죽 공급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기르던 개와 고양이를 빼앗긴 일본인들의 회고는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대표로 하나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쇼와 17년(1942)년 여름, 오카야마에 살고 있었다. 면사무소에서 갑자기 “고양이를 공출하라”는 연락이 있었다.

    (중략)

    “고양이를 뭐에 쓰려고요?”

    면사무소 직원이 답했다.

    “애투섬을 지키는 군인의 코트 뒤에서 머리를 보호한다. 애투섬은 영하 40도나 돼. 나라에 유용하게 쓰이는 경사스러운 일이다.”

    (중략)

    애투섬의 일본군은 옥쇄했다. 내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름 방학 때면 늘 생각한다."


    이렇듯 일본이 집에서 기르는 개와 고양이 가죽까지 벗겨 모은 이야기는 일본에서도 많이 거론되고 있다. 이런 책이 대표적이다. やねこがえた戦争をうばわれた動物たちの物語(개와 고양이가 사라졌다 – 전쟁에서 목숨을 빼앗긴 동물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만 보아도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토종개를 죽여 가죽을 모은 게 민족정기 같은 것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음이 분명하다.  일본인들 때문에 사라지고 파괴된 우리 유산은 많다. 그리고 의도적인 악의에 의해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것들도 많다. 그런 부분에서는 마땅히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고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았던 목적을 임의로 만들어 붙인 뒤 허수아비치기로 우리끼리 흥분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부연하자면, 일본인들이 본토에서 저렇게 악착같이 거둬들인 개와 고양이들의 가죽은 제대로 사용된 양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방치되다가 바로 폐기된 양이 더 많았다고 한다. 모아들이는 데만 열중했을 뿐 수집한 가죽을 제대로 처리할 기술자가 부족했던 게 원인 중 하나고, 미군의 공습과 봉쇄 때문에 기껏 모아서 처리한 가죽도 제대로 공장으로 운반할 수송수단이 부족했던 것도 문제였다.

    검증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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